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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가능성과 민주주의

깨끗한 환경은 인권일까요? 민주주의는 기후 위기에 너무 느릴까요? 시위는 어디까지 가도 될까요 — 여섯 개의 어려운 질문.

깨끗한 환경에 대한 인권이 있을까요

2022년 7월 28일, 유엔총회는 역사에 남을 표결을 했습니다. 깨끗하고 건강하며 지속가능한 환경에 대한 권리를 인권으로 인정한다는 결의(A/RES/76/300)가 찬성 161, 기권 8, 반대 0으로 채택된 것입니다. 법적 구속력은 없는 선언이지만, 국제사회가 환경을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한 권리의 문제’로 공식 확인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헌법은 이 선언보다 40년 이상 앞서 있습니다. 1980년 헌법(제8차 개정)이 “깨끗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처음 명문화했고, 현행 헌법은 제35조에서 “모든 국민은 건강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를 가지며, 국가와 국민은 환경보전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라고 정하고 있습니다. 다만 조문이 있다는 것과 그 권리가 실제로 작동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 간극을 좁힌 것이 2024년 8월 29일의 기후 결정입니다. 헌법재판소는 2031년 이후의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비워 둔 탄소중립기본법 조항에 헌법불합치를 선언하면서(2020헌마389등), 국가가 기후 위기로부터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할 의무를 진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종이 위의 환경권이 국가를 움직이는 권리로 실체화된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기후 위기에 너무 느릴까요

여기 불편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민주주의는 토론하고, 설득하고, 표결하고, 선거로 심판받는 체제입니다. 그 모든 절차에는 시간이 들고, 다음 선거를 의식하는 정치는 인기 없는 장기 과제를 뒤로 미루기 쉽습니다. 그런데 기후의 시간표는 인간의 선거 주기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목소리가 나옵니다 — “과학이 답을 아는 문제라면, 전문가에게 맡기거나 강한 권력이 신속하게 결정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너무 느리다”는 쪽의 논거는 이렇습니다.

  • 4~5년 주기의 선거는 정치인의 시야를 짧게 만듭니다. 비용은 지금 들고 효과는 수십 년 뒤에 나타나는 정책은 표가 되지 않아 계속 뒤로 밀립니다.
  • 이해관계자가 많을수록 타협은 최소공배수가 아니라 최소공약수로 수렴합니다. 모두가 조금씩 양보한 결과가 과학이 요구하는 수준에 못 미칠 수 있습니다.
  • 실제로 여러 민주주의 국가가 스스로 정한 감축 목표를 지키지 못해 왔다는 점이 이 우려에 힘을 싣습니다.

“그래도 민주주의여야 한다”는 쪽의 논거는 이렇습니다.

  • 시민의 동의 없이 강제된 전환은 지속가능하지 않습니다. 수십 년을 버텨야 하는 정책은 사람들이 납득하고 선택했을 때에만 정권이 바뀌어도 살아남습니다.
  • 권위주의 체제에는 오류를 수정하는 능력이 없습니다. 비판 언론과 야당과 선거가 없는 곳에서는 잘못된 정책이 잘못됐다는 신호 자체가 차단되고, 환경 피해를 감추는 것도 쉬워집니다.
  • 과학은 ‘지구가 더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지만, ‘누가 얼마나 부담할 것인가’는 사실이 아니라 가치의 문제입니다. 가치의 문제를 정할 자격은 전문가가 아니라 주권자인 시민에게 있습니다.

느리지만 스스로 고칠 수 있는 체제와, 빠르지만 잘못된 길에서 돌아올 수 없는 체제 — 어느 쪽이 기후 위기라는 장거리 경주에 유리할까요. 이 질문에 정답표는 없습니다. 다만 이 질문을 공개적으로 던지고 다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기후·환경 시위는 어디까지 가도 될까요

시위에는 하나의 스펙트럼이 있습니다. 신고를 마친 집회와 행진은 제21조가 보장하는 권리이고, 한국에서도 매년 시민들이 기후 대응을 요구하며 도심을 행진하고 청소년들이 등교 대신 광장에 서기도 했습니다. 논쟁은 그 다음 구간에서 시작됩니다. 신고된 집회를 넘어 도로를 점거하고, 미술관의 명화 앞에서 소동을 벌이고, 공항 활주로에 몸을 붙이는 시민적 저항(학술 용어로는 ‘시민불복종’) — 법을 어기는 것을 알면서, 처벌을 감수하며, 비폭력적으로 법을 어기는 항의는 어디까지 정당할까요.

말부터 짚고 갑시다. ‘불복종’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 모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의 나라에서, 주권자가 대체 누구에게 복종한다는 것일까요? 여기서 어기는 대상은 권력자가 아니라 주권자들이 함께 만든 법률입니다. 주권자라도 민주적 절차로 만들어진 법에는 따를 의무가 있고, 그 법 하나를 공개적으로 어기며 사회의 양심에 호소하는 행위를 학계는 오래전부터 ‘시민불복종’이라 불러 왔습니다. 다만 주권자의 능동성을 살려 시민적 저항이라 부르는 흐름도 있습니다. 우리 헌법 전문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밝혀 두었듯, 저항은 이 헌법의 낯선 손님이 아닙니다.

독일에서는 ‘마지막 세대(Letzte Generation)‘라는 단체가 도로에 손을 접착제로 붙여 교통을 멈추는 시위를 반복하면서 사회 전체가 찬반으로 갈라졌습니다. 참가자에게 실형이 선고되기도 했고, 여론의 반발 속에 단체는 2024년 도로 봉쇄 방식을 중단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논쟁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닙니다 — 시위의 수단이 제3자의 일상과 부딪히는 문제라면, 한국은 이미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둘러싸고 같은 구조의 논쟁을 겪었습니다.

“불편한 저항까지 정당화될 수 있다”는 쪽은 이렇게 말합니다.

  • 위기는 절박한데 합법적 통로는 이미 수없이 시도되었고, 불편을 만들지 않는 요구는 뉴스가 되지 않습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요구는 정책이 되지 못합니다.
  • 여성 참정권도 노동권도, 역사적으로 권리의 확장은 당대의 다수가 눈살을 찌푸린 저항을 거쳐 왔습니다. 오늘의 당연한 권리 중 여럿이 어제의 ‘불법 시위’가 얻어 낸 것입니다.
  • 처벌을 피하지 않고 감수하는 비폭력 저항은 법질서 전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양심에 호소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수단의 한계를 지켜야 한다”는 쪽은 이렇게 답합니다.

  • 목적이 정당하다고 수단까지 정당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절박함’을 이유로 법의 한계를 넘는 것이 허용되면, 어떤 주장이든 같은 논리로 타인의 일상을 멈춰 세울 수 있게 됩니다.
  • 도로에 묶이는 것은 정책 결정권자가 아니라 출근길의 시민과 구급차입니다. 항의의 상대와 피해의 대상이 어긋나 있다는 것입니다.
  • 시위 방식에 대한 반감은 기후 대응이라는 대의에 대한 지지까지 갉아먹을 수 있습니다. 설득해야 할 시민을 적으로 돌리는 방식은 목적 달성에도 불리하다는 지적입니다.

두 논거 모두 헌법 안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 한쪽은 집회와 표현의 자유에, 다른 쪽은 법치주의와 제3자의 권리에. 어디에 선을 그을지는 법원과 사회가 사건마다 다시 다투는 문제이고, 그 판단에 앞서 여러분 각자가 스스로 저울질해 볼 문제입니다.

포퓰리즘과 극단주의는 이 주제를 어떻게 이용하나요

기후와 환경은 감정이 실리는 주제인 만큼, 이를 정치적으로 동원하려는 시도도 세계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몇 가지 전형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 기후과학 부정 — 측정된 데이터 자체를 부정하거나, 전 세계 과학자들의 합의를 음모나 조작으로 모는 방식입니다.
  • ‘엘리트의 강요’ 프레임 — 기후 정책 전체를 ‘도시 엘리트가 서민에게 강요하는 사치’로 묶어 버리고, 정책의 내용이 아니라 ‘누가 말하는가’를 공격하는 방식입니다.
  • 정당한 우려의 동원 — 풍력발전 입지, 송전선 경과지, 산업 구조조정을 둘러싼 주민과 노동자의 실제 걱정을 파고들어, 해결이 아니라 ‘우리 대 그들’의 대결 구도를 키우는 방식입니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정 나라·정당·진영만의 일이 아니라 논쟁적 주제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며, 풍력단지 옆에 살게 될 주민의 걱정이나 전환으로 일자리를 잃을 노동자의 불안 자체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응답해야 할 정당한 목소리라는 점입니다. 그 목소리를 묵살하는 것이야말로 동원의 토양을 넓혀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분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정당한 논쟁의 대상이지만, 측정된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감축의 속도, 원전과 재생에너지의 비중, 비용의 배분, 지역 주민 보상 — 이런 것들을 놓고 다투는 것은 민주주의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반대 의견을 ‘기후 부정론자’로 몰아붙이는 것 역시 토론을 죽이는 일입니다. 반대로 온도계가 가리키는 숫자를 취향의 문제처럼 다루는 순간, 토론의 공통 기반 자체가 무너집니다. 사실 위에서 가치를 다투는 것과, 사실 자체를 흔드는 것을 구별하는 눈이 시민에게 필요한 이유입니다.

시민은 어떻게 참여할 수 있나요

거리로 나가는 것만이 참여는 아닙니다. 한국의 제도는 생각보다 많은 통로를 열어 두고 있습니다.

  • 선거 — 기후·환경 공약을 비교하고 표로 답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강력한 참여입니다(제24조).
  • 청원 — 헌법 제26조의 청원권을 바탕으로, 국회 국민동의청원에서 일정 수 이상의 동의를 모으면 청원이 위원회에 회부됩니다.
  • 알 권리 행사 — 우리 동네 배출 시설, 환경 예산, 정책 근거 자료를 정보공개 청구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
  • 공론화와 주민참여 — 2017년 신고리 원전 공론화처럼 시민이 숙의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조례 제정 청구·주민투표 같은 지역의 통로도 있습니다(지방자치와 주민참여).
  • 소송 — 2024년 기후소송은 청소년과 시민들이 헌법재판소의 문을 두드려 법을 바꾸게 만든 사례입니다.
  • 공론장에 목소리 내기 — 입법예고에 의견을 내고, 공청회에 참석하고, 학교와 지역의 토론에 참여하는 일상의 발언도 참여입니다.
  • 소비와 생활 — 무엇을 사고 무엇을 타는지의 선택도 신호가 됩니다. 다만 개인 실천과 구조 변화의 관계를 어떻게 볼지는 그 자체로 열린 논쟁입니다(기후 보호와 사회 변화 참고).

어느 통로가 가장 효과적인지는 사안마다 다르고, 통로가 많다는 것이 통로가 충분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앞 장의 시위 논쟁은 바로 ‘제도의 통로가 충분히 작동하는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이 통로들은 쓰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살아 있는 제도가 됩니다.

결론: 민주주의는 지속가능한가요

이 자료집을 관통해 온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한쪽 시각은 민주주의의 느린 절차와 짧은 선거 주기가 장기 위기 대응의 걸림돌이라고 봅니다. 다른 쪽 시각은 동의를 만들고 오류를 고치는 능력이야말로 수십 년짜리 전환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며, 민주주의는 지속가능성의 조건이라고 봅니다. 두 시각은 모두 진지한 근거를 갖고 있고, 어느 쪽이 옳은지는 교과서가 정해 줄 수 없습니다.

어쩌면 답은 ‘어느 체제인가’가 아니라 ‘어떤 시민인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과 가치를 구별하고, 반대편의 논거를 끝까지 듣고, 제도의 통로를 실제로 사용하는 시민이 많을수록 민주주의는 빨라지고 단단해집니다. 민주주의가 지속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 자체가, 결국 시민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런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길러집니다 — 그 이야기를 다음 권, 지속가능발전교육 (4권)에서 이어 갑니다.

🔗 관련 기본권

제35조 · 환경권제21조 ·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제24조 · 선거권제10조 · 인간의 존엄과 행복추구권